2번은 영적인 복과 물질적 복, 영적 복과 물질적 복에 대해서 같이 보죠.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이제 깊은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요. 기독교 교회는 유대인들을 과거 이제 중세 교회도 있고 근세,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을 굉장히 물질적인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육체적인 사람들로 생각했어요. 제가 베레시트 첫 번째 과에서 말씀드렸죠.
첫 번째 과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말씀이,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그냥 단순한 창조 신앙을 넘어서서 유일신 신앙이, 유일신 하나님께서 물질을 만드셨다고 하는 유물 신앙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무엇입니까? 영이 아니라 물질이에요. 이 창세기의 말씀이 그래요. 이 결국 모든 물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 만드신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있는 물질이라고 하는 거,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과 인간의 육체,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영적으로 만드신, 그야말로 영적 존재들이 물질적인 존재인거와 함께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이해 우리가 지혜의 시작과 그 밖에 다른 토라를 통해서 배운 인간 이해를 보면, 네펫이라든지 이런 인간을 지칭하는 이야기는 영과 육을 분리하지 않는 하나된, 완전히 영과 육이 하나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영혼육을 나누고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이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유대적인 세계관이 아니에요. 그것은 플라톤 세계관입니다. 철저하게 헬라적인 세계관이죠. 이 플라톤 세계관이 나중에 이제 이 기독교로 들어오면서 영혼과 육체를 아주 이렇게 나눠 놓게 됐고요, 그리고 그 단순히 나누게 아니라 육체는 저급하고 물질은 저급하고 영혼은 귀한 것이다라고 하는 이러한 분법적인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토라의 세계관은 일원론이예요. 물질과 영은 소통하는 것이고 하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속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토라와 연결된 복이 이게 아닌 거예요.
너 하늘나라 가면 복 받는다, 천국에서 복 받는다, 아니라 이 땅에서 복 받는다라는 말씀이 이제 여기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거죠. 이게 우리에게 주는 어려움이 있어요. 어려움이 있어.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갈 때 그럼 물질적인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복받은 사람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냐, 이런 이런 질문부터, 그러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우리의 목적인가, 뭐 여러 가지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만, 토라는 분명하게 물질적인 복과 하나님의 복, 하나님께서 토라 안에 주신 복을 일치시키고 있다라는 거죠.
이게 이제 첫 번째 토라가 주고 있는 물질에 대한 태도입니다. 자, 두 번째, 여기서 여러분 이해하셔야 되는 게, 이게 물질이라고 하는 게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땅과 연결된 물질이라는 거예요. 땅, 무슨 땅인가요? 여기서 땅이란 어느 땅이죠? 아무 땅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이스라엘 땅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 땅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냥 우리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라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에서의 그 성공과, 그리고 그 땅에서의 복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 안에서의 형통함, 그 땅에서의 복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 땅을 벗어나고 그 땅을 떠나서 하나님을 떠나서 누리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서의 복이죠. 그래서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주신 구원과 복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스라엘 땅과 연결되어 있어요.
자, 그러면 이제 성경 잘 읽으면 아실 거예요. 요번 구절 읽으면, 이번과를 꼭 같이 읽어 보세요. 읽으면 하나님의 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 땅에서 하나님 주신 풍성한 열매를 누리고 풍성한 자손을 낳고 잘 사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토라를 없이 여기고 토라의 복을 떠난 백성들에게 주시는 저주는 무엇입니까? 그 땅을 잃어버리는 것이, 그 땅을 잃어버리는 거, 그 땅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이방의 땅에 끌려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벌을 이방을 통해서 받게 되는 거죠.
자, 그런데 결국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하나님은 그게 끝이 아니에요. 예, 하나님은 끝이에요? 그렇게 이방에 끌려가고 이방에서 살게 되는 게 끝이에요? 그 오늘 말씀 읽어 보신 분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도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거기서 예, 26장 40절 이하를 보시면 그 하나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속이란 무엇인가, 결국 이 모든 하나님의 복과 저주가 나온 다음에 말씀하신 40절 이하의 말씀 보면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지은 죄와 조상들이 지은 죄, 곧 그들이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반항한 허물을 고백하면, 또 그들이 나를 거슬렀다는 것과, 그래서 내가 그들을 원수가 사는 땅으로 보냈다는 것을 깨닫고 할례받지 못한 그들의 마음이 겸손해져서 자기들이 지은 벌을 기꺼이 받으면, 나는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또 그 땅도 기억하겠다." 레위기 26장 40절을 읽었습니다. 자, 결국 여러분 토라는 하나님의 복과 저주마저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어지는 것이다라고. 완전히 괄호를 쳐놓는 거죠. 그러니까 과거에 기독교 세계는 이스라엘이 전 세계에 흩어지고, 전 세계에서 고난당하고, 고통당하는 거 보면서 뭐라고 얘기했냐면,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셨어요. 왜 버리셨어요? 메시아를 너희가 버렸기 때문에 버리셨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건 뭐죠? "너희가 온 땅에 흩어져 가지고 벌 받을지라도 다시 회개하면 어떻게 돼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한다. 다시 그 땅을 너에게 회복하겠다. 회복하여 주겠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이고, 이 언약이 토라의 언약인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사도 바울이 율법의 저주를 얘기했다고 해서 율법의 저주가, 율법이 우리가 죄 지으면 끝장이다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토라는, 율법은 여전히 회개 가능성과 회복과 용서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고, 사도 바울이 얘기한 용서와 회복의 가능성이, 증거가 그게 바로 메시아 예수이고, 그 확실한 증거로 나타난 것이 메시아 예수님의 부활인 거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야, 율법은 끝났어. 율법은 안 돼. 그러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율법이 얘기한 이 회개와 회복의 진정한 가능성은 메시아의 부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또 다른 복음과 또 다른 종교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토라의 완성에 대해서 아멘 하고 있는 거예요. 아멘, 이게 진짜 이루어졌다는 거죠.
자, 여러분, 지금 여기에 그 오늘의 말씀의 핵심, 그러니까 왜 오늘의 말씀이 대단히 물질적이지만 대단히 영적인지를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왜냐면 그 땅이라는 것은 물질이지만 물질적인 땅이고, 그 복은 물질적인 복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적이면서 영적인 하나님의 복이고 응답이라는 거죠.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우리가 이 땅에서 건강과 물질과 평안을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냐? 아니요, 허락하십니다. 근데 그 허락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경륜과 하나님 나라의 약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일을 구하라." 왜냐면 이런 거 중요하지 않으니까 얘기하신 게 아니라 뭐라고 하셨어요? "먼저 그 나라와 그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조차도 물질적인 복에 대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중요하지 않으니까든지 뭐 너희들 굶든지 그냥 힘들든지 그냥 무조건 따라와"가 아니라 여전히 그 나라를 따르고 그 나라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이 땅의 복도 따라온다라고 하는 이 토라의 관점에 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단순한 금욕주의나 단순한 청빈의 삶, 가난을 추구하는 삶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우선순위, 영적 우선순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거, 이게 토라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과거 중세에서는 이러한 유대인의 어떤 이 땅에 대한 그들의 노력과 또 그들의 그 부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을 교회는 굉장히 죄악시했습니다. 죄악시했어요.
그래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에게 다른 직업이 허락되지 않고 오직 고리대금업, 대금업만 허락을 했다가 나중에 이제 저리 대금업 교회가 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가져가면서 어 이 신용불량자들을 위한 고리대금업을 유대인들에게 맡겨 놓고, 맡겨 놓고 나서는 이제 고리대금업자라고 욕하는 그런 어떤 아주 이율배반적인 그러한 유대인에 대한 나쁜 그런 인상들을 퍼뜨렸던 게 과거 중세 유럽이었다. 제가 제일 처음에 읽었던 세익스피어의 그 희곡도 베니스 상인이었거든요. 그러면서 속으로 어렸을 때 "야, 저 유대인은 참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이나." 이런 생각을 제가 어린 마음에 받아들였던 생각이 있습니다. 자, 이런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2000년 동안 갖고 있었던 이 고정 관념이 이 토라를 통해서 바뀌어져야 되는 부분에 대해서 우선 여러분들과 꼭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아, 유대인들이 왜 물질적으로도 저렇게 성공하고 또 영적인 성공을 같이 추구하느냐, 그게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토라의 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의 그 종말론은 유대인들의 종말론은 조금 특별한 종말론이 있어요. 자, 여러분, 우리는 이제 죽어서 천국을 간다라는 것을 이것을 그냥 같이 설명을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다 어때요? 다른 해석을 하기 어려운데, 유대인의 종말론은 이중적인 종말론입니다. 하나는 뭐냐면 메시아 나라가 있어요. 메시아 나라.
메시아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국가적인 나라인 종말론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구원받게 될 바로 메시아의 백성들이 함께 누리게 될 그런 국가적인 공동체적인 구원을 바로 첫 번째 메시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하고 그것을 천년 왕국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천년 왕국이라고 얘기하는데, 천년 왕국 마지막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때 이제 부활이 일어나면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완성되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받게 되죠. 그 심판은 어떤 심판이요? 유대 민족은 그냥 다 오케이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오케이가 아니라, 그 심판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행위의 심판이라는 거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상과 벌이 있는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회와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정직한 심판이 있고 이 심판은 믿는 자도 피할 수 없는. 자,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떠한 상을 받는 사람으로 설 것이냐가 결정되는 개인적인 상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나라의 나라를 구원하시는 나라에 대한 회복이 있고, 또 하나는 개인에 대한 상이 결정되는 백보좌 심판, 다가오는 세상에 심판이 있다라는 이 사실을 성경은 얘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끊임없이 이 심판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이 심판은 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기 보다는 상받는 사람과 상 받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 부분은 사실 많은 경우에 복음주의 교단에서는 이 설교를 참 불편해해요. 왜냐면 우리는 예수 믿고 그냥 누구든지 다 천당 가는 건데, 이런 나중에 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라는 것을 불편해 하는데, 그러나 행위의 심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겁니다. 자, 이 부분을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토론 질문, 출애굽기 24장 12절 말씀을 가지고 그러면 도대체 토라가 개인이 영생을 얻고 다가오는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매뉴얼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토라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셨던 볼까요? 예, 24장 12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쳐서 몸소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에게 주겠다."
자, 제가 여기에 썼습니다만, 토라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고 한다면, 도대체 예수의 제자된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토라이고, 토라에 대한 예수님의 더 크신 계명들이 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토라는 여전히 우리가 학습해야 되고, 공부해야 되고, 묵상해야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자, 여러분, 이 부분에 대해서 뭐 나중에도 우리가 더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토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토라에 대한 이야기들은 마태복음 5장에 나와 있는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씀도 있고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당할 때 인용하신 모든 말씀들이 무슨 말씀들이죠? 신명기의 말씀들이구요,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물어보셨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베후코타이, 그러므로 너희는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동일하게 이 토라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고요.